낙화암과 삼천 궁녀이야기는 진짜일까?

백마강에서 바라본 낙화암과 낙화암 꼭대기에 있는 백화정(부여군청)
부소산성의 한편은 백마강에 의지하고 있어요.
부소산과 백마강이 만나는 곳에 낙화암이란 높은 절벽이 있어요.
낙화암에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오고 있어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외적의 손에 죽지 않겠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었어요.
이때 성안에 있던 후궁과 궁녀들이 부소산성으로 도망을 가다 큰 바위에 이르렀어요.
궁녀들은 외적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어요.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어요.
삼국유사에는 궁녀들이 강으로 뛰어든 이 바위를 ‘타사암’이라 쓰고 있어요.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궁녀들의 수가 갑자기 삼천 명으로 크게 늘어났어요.
바위 이름도 궁녀를 떨어지는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으로 바뀌었어요.
낙화암 고란사 극락보전 벽화(충남 부여군)
왜 궁녀들의 수가 갑자기 삼천 명으로 늘어났을까요?
백제보다 인구수가 5배나 많았던 조선 시대에도 궁녀는 가장 많았을 때조차 700명을 넘지 못했어요.
그런데 백제에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더 부풀리고 과장해서 전한 것이에요.
이것은 아마도 백제가 멸망한 이유를 제대로 나라를 돌보지 않은 의자왕에게서 찾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로 보여요.
한때 총명하고 군사를 잘 이끌어 신라를 벌벌 떨게 했던 의자왕! 그는 외적에 나라를 빼앗긴 책임 때문에 죽어서도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 셈이지요.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사비)에는 강한 백제를 이끌던 성왕의 모습과 허무하게 나라를 잃은 의자왕의 모습이 모두 남아 있어요.
어떤 모습의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어야 부강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질까요?
성왕과 의자왕, 백제의 두 국왕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그 답을 찾아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