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향로를 땅 속에 묻은 이유는?

백제 금동 대향로는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떻게 녹슬지도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진흙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진흙 때문에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형태가 변하지 않았던 거예요.
백제 금동 대향로 주변에서는 나무 곽과 천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천으로 향로를 싸서 나무 곽 속에 넣어 땅속에 묻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누가, 왜 이곳 능산리 절터에 백제 금동 대향로를 묻었던 것일까요?
혹시 백제의 멸망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비에서 부흥을 꾀한 성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다시 찾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신라 진흥왕과 군사 동맹을 맺어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았어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백제는 신라 진흥왕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말았어요.
진흥왕은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고 난 뒤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마저 점령해 버렸지요.
그러자 백제는 신라와 전투를 벌였어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어 전투를 치르게 된 거지요.
성왕의 태자 여창(훗날 위덕왕)이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나가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어요.
처음에는 백제가 승리하는 듯했지만 이내 신라에 유리한 상황이 되었지요.
성왕은 신라군과 힘들게 싸우고 있는 태자를 위로하고자 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했어요.
하지만 관산성으로 가던 길에 성왕은 숨어 있던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어요.
이후 성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위덕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 성왕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능산리에 절을 세웠던 것 같아요.
이 능산리 절터에서는 창왕(위덕왕)이 만들고,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이 새겨진 사리 보관 용기(창왕명 석조사리감)가 발견되기도 했어요.
백제 금동 대향로가 발견된 그 절터이지요.
백제 금동 대향로도 성왕의 제사 때 향을 피우기 위해 절 공방에서 만든 것으로 보여요.
그렇다면 백제 금동 대향로를 목곽 안에 넣어 공방 터에 묻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제가 멸망할 즈음 스님들이 귀중한 향로가 적들에 의해 훼손될까봐 땅에 묻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백제의 멸망이 스님들에게는 얼마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는지 짐작이 되나요?
백제 금동 대향로를 만드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