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자신감을 드러내다

발해는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당의 속국이 된 건 아니에요.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인 만큼 고구려 문화가 바탕을 이루었어요.
여기에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부강한 나라가 되었지요.
발해가 성장하자 발해를 대하는 당의 태도도 바뀌었어요.
이전까지는 당은 발해를 중국의 행정 구역인 ‘군(郡)’으로 불렀어요.
그러나 발해가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자 당은 독립된 한 나라로 인정해 ‘발해국’으로 부르기 시작했어요.
나라가 날로 부강해지면서 문왕은 자신감이 높아졌어요.
그래서 왕의 호칭을 황제로 바꾸었지요. 당시 황제의 호칭을 쓰는 나라는 당밖에 없었어요.
정효 공주 무덤 묘비
한국학중앙연구원
실제로 문왕의 넷째 딸 정효 공주의 묘비에 새겨진 글을 보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묘비에 문왕을 ‘황상’이라 표현하고 있어 문왕을 황제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또한 발해는 ‘대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어요.
이것은 문왕이 황제의 나라를 자처하며 발해를 당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알려 주지요.
한편 문왕은 일본에도 발해의 자신감을 파격적으로 나타냈어요.
문왕은 771년 6월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는 장인이고, 일본은 발해의 사위 나라라고 불렀어요.
발해를 중심으로 일본을 낮추어 부른 것으로 발해가 강대국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어요.
발해는 문왕이 60년 가까이 왕위에 있으면서 체제 정비를 통해 아주 강한 나라로 발돋움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