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가 서려 있는 온달산성

온달산성은 고구려 온달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성이에요.
온달 장군은 평강 공주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바로 그 ‘바보 온달’이에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고구려 25대 왕인 평강왕(재위 559~590) 때의 일이에요.
평강왕에게는 예쁜 딸 평강 공주가 있었어요.
그런데 공주는 어려서부터 잘 울었어요. 그럴 때마다 왕은 공주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공주, 그만 울어라. 그렇게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
온달은 이집 저집 구걸하며 홀로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외모도 우스꽝스럽고 볼품없어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어요.
평강왕은 공주가 울 때마다 공주의 우는 버릇을 고쳐주려 농담처럼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며 공주를 달랬던 것이지요.
시간은 흘러 어느덧 평강 공주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어요. 그러자
평강왕은 훌륭한 귀족 청년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였어요.
그런데 평강 공주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어요.
“싫습니다. 폐하, 저는 제가 울 때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습니다.”
평강왕은 이런 공주의 태도에 매우 당황스러웠어요.
“오~ 얘야, 그건 네 울음을 그치게 하려 했던 거짓말이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온달과 꼭 결혼하겠습니다.”
평강왕은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공주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어요.
결국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고, 공주는 그 길로 물어물어 온달의 집을 찾아갔어요.
온달은 믿기지 않았지만, 공주의 말을 믿고 결혼을 하였지요.
평강 공주는 궁궐에서 가져온 패물을 팔아가며 바보 온달에게 무술과 학문을 닦도록 하였어요.
온달은 평강 공주의 도움으로 하루하루 실력을 키워나갔어요.
그렇게 세월이 지났어요.
온달은 매년 3월 3일을 맞이하여 열리는 큰 사냥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온달은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맘껏 뽐냈지요.
“아니, 저렇게 무술을 잘하는 청년이 누구인가?”
“온달이라고 합니다.”
평강왕은 예전 바보 온달의 모습을 떠올리며 깜짝 놀랐어요.
그러다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에 쳐들어왔어요.
이때 온달은 고구려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적군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지요.
이윽고 평강왕은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고 큰 벼슬을 내렸어요.
이후 영양왕(재위 590~618)이 즉위하자 온달은 왕 앞에 나아가 말했어요.
당시 삼국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거세게 다투고 있었어요.
“신라에게 빼앗긴 조령(충주 지방)과 죽령의 서쪽 땅(강원도 일대)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온달은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그만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싸움이 끝난 후, 온달의 장례를 치르려고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모두 깜짝 놀랐어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평강 공주가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였어요.
“장군, 삶과 죽음이 이미 정해졌소. 그러니, 이제 돌아갑시다.”
그러자 비로소 관이 움직여 온달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어요. 그가
죽은 곳이 바로 단양의 온달산성이라고 해요.
단양의 온달산성은 남한강이 한눈에 훤히 보이는 작은 크기의 산성이에요. 성벽 안팎을 모두 돌로 쌓았고, 벽 사이에까지 작은 돌로 촘촘히 채워 놓아 매우 튼튼해요.
가파른 절벽과 직각으로 만든 성벽은 적의 침입을 막기에 효과적이었어요.
한편 온달산성은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죽었다고 하는 ‘아단성’ 후보지의 한 곳으로 추측되고 있어요.
또 한편으로 온달산성은 온달의 설화가 내려오지만, 온달산성은 축성 양식으로 보면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지요.
여러분 이제 고구려를 왜 산성의 나라라고 하는지 알겠지요? 고구려는 자연 지형을 이용해 많은 산성을 쌓아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을 수 있었어요.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일대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은 1,500여 년 전 고구려 사람들의 지혜와 기술이 녹아 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에요.
그러나 한편으로 고구려를 지켜주었던 성곽의 수가 많았던 만큼, 그것을 쌓느라 또 지키느라 피땀 흘린 수많은 고구려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