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 대왕릉비가 발견되기까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시신을 묻는 무덤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무덤 앞에 그 인물이 살아있을 때의 활동이나 업적을 기념하는 글을 새긴 돌을 세워 놓았어요.
그 돌을 비석이라고 해요. 그냥 ‘비’라고도 하지요.
고구려의 장수왕도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어요.
이 비석이 바로 광개토 대왕릉비랍니다.
이 비석은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해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알려져 있어요.
414년(장수왕 2)에 세워진 광개토 대왕릉비는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었어요.
이후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 이 비석에 대해 조금 소개한 내용이 있어요.
‘용비어천가’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업적을 노래한 시인데,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땅에 아주 큰 비석이 있다고 서술되어 있어요.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의 장군총을 금나라 황제의 묘로 잘못 소개한 글이 있어요.
이 서적에도 광개토 대왕릉비의 존재에 대해 소개하고 있어요.
‘용비어천가’처럼 비석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없고 단순히 옛 금나라 땅에 큰 비석이 있다는 것만 서술되어 있어요.
이처럼 조선 전기의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광개토 대왕릉비의 존재는 알았지만, 고구려의 비석이 아니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황제의 비석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당시 조선인들은 만주 지역이 여진족의 땅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곳에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를 직접 조사하거나 비문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어요.
여기에 17세기 이후 만주족은 자신들이 세운 청나라가 일어난 만주 지역을 신성한 곳이라고 여겨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지역으로 만들었지요.
그래서 비석의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히게 되었지요.
광개토 대왕릉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876년(고종 13) 이 지역에 청나라의 행정구역이 설치되면서예요.
1877년 이 지역의 책임자로 온 어느 청나라 관리가 이끼로 덮여 있던 광개토 대왕릉비를 발견했어요.
그는 광개토 대왕릉비 중에서 이끼가 덮여 있지 않은 일부를 탁본하였어요.
탁본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알기 위해 먹을 이용해 종이에 글자를 본뜨는 방법을 말해요.
당시 청나라 관리는 자신이 뜬 탁본을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였는데, 탁본 내용을 통해 광개토 대왕릉비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