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고구려의 발전

4세기 말에 왕위에 오른 광개토 대왕은 중국의 혼란한 상황과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대규모 정복 활동을 펼쳤어요.
우선 그는 만주의 랴오둥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어요.
당시의 랴오둥 지역은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잡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거든요.
왜냐하면, 랴오둥 지역이 중국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원과 물자가 풍부하였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랴오둥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고구려는 마침내 광개토 대왕 때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랴오둥 지역을 차지한 덕분에 고구려는 군사력이 더욱 막강해졌어요.
광개토 대왕은 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활발한 정복 전쟁을 이어나갔어요.
이후 고구려는 동쪽으로 숙신과 동부여를 정복하고,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해 임진강과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물리치고 한반도 남부지역에도 영향력을 확대했어요.
5세기 고구려의 세력 확대
광개토 대왕의 활발한 정복 활동 덕분에 고구려는 장수왕(재위 413~491) 때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어요.
5세기 초에 즉위한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수도인 국내성 부근에 광개토 대왕릉비를 세웠어요.
이어 427년에는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국내성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바닷길을 이용해 보다 적극적인 국제 교류를 펼치기 위해서였지요.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은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계획하고 남하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어요.
먼저 백제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킨 뒤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했지요.
이로써 고구려의 세력 범위는 랴오둥 지역에서부터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어요.
이러한 사실은 당시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 지역을 차지한 뒤에 세운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잘 알 수 있어요.
비문에서는 고구려를 ‘태왕(太王)의 나라’로, 신라를 ‘고구려 아래에 있는 동쪽 오랑캐[東夷]’로 기록하고 있는데, 고구려왕이 신라의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주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답니다.
지금부터 동북아시아 최강국을 이룩한 고구려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의 업적을 알려주는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