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고구려비의 발견과 비문 내용

1979년 4월 8일, 당시 충청북도 중원군의 입석(立石)마을 입구 선돌에서 글씨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학자들이 모였어요.
마을을 지키는 신성한 돌로 여겨진 선돌은 1972년에 일어난 대홍수 때 쓰러졌었는데, 이 마을 청년들이 다시 세워 마을의 상징으로 삼고 있었어요.
이후 향토문화연구회 사람들이 이 선돌을 살펴보다가 글자를 발견하게 되었고,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역사학자들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지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역사학자들이 돌에 낀 이끼를 걷어내고 탁본을 하였어요.
그러자 첫머리에서 ‘고려태왕(高麗太王)’이란 글자가 선명히 드러났지요.
‘고려(高麗)’는 고구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던 선돌이 갑자기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어요.
이 비석은 충청북도 중원군에서 발견된 고구려비라는 의미로 ‘중원고구려비’로 이름 붙여졌어요.
이후 중원군이 충주시와 합쳐지면서 비석의 명칭이 ‘충주 고구려비’로 바뀌게 되었지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충주 고구려비에는 비의 네 면에 한자로 총 칠백여 자가 새겨져 있어요.
그러나 비, 바람 등 세월의 흔적에 의해 많은 글자가 닳아서 지금은 이백여 자만 읽을 수 있답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아요.
고구려 대왕이 신라 매금(신라 왕)을 만나 영원토록 친선을 맺기 위해 중원(충주)에 왔으나 … 동이(동쪽의 오랑캐) 매금에게 옷을 내려 주었다.
- 충주 고구려비 -
충주 고구려비에는 신라의 왕을 ‘동이(동쪽 오랑캐) 매금(마립간)’이라 표현하고 있어요.
아울러 신라의 왕과 신하를 고구려로 불러들여 관리들이 입는 옷을 나누어 준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요.
이를 통해 5세기 장수왕 때 고구려가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실시하여 백제를 밀어내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음을 알 수 있지요.
또한 고구려가 신라의 왕과 신하를 고구려로 불러들일 정도로 신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어요.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가 주변국을 거느리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였음을 엿볼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