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를 넓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다

법흥왕은 여러 정책을 통해 권력을 강화한 뒤 눈을 돌려 영토 확장에 힘썼어요.
당시 신라 주변에는 고구려, 백제 외에 남쪽에 가야 연맹이 있었는데, 특히 법흥왕은 남쪽 지역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이러한 신라의 팽창에 부담을 느낀 대가야가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해왔어요.
법흥왕은 귀족 비조부의 여동생을 대가야의 이뇌왕과 결혼하도록 했어요.
여러 해가 지난 후 532년에는 금관가야의 왕이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왔어요.
금관가야의 항복은 신라가 낙동강과 남해안의 중요한 곳이었던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어요.
이러한 영토 확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법흥왕은 독자적인 연호인 ‘건원’을 사용했어요.
‘군주가 다스리는 국가에서 연도를 세는 호칭’을 뜻하는 연호는 원칙적으로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어요.
따라서 신라 법흥왕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은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주적인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만큼 당시 왕과 국가의 힘이 강했음을 의미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