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삼국 시대 고분

이 고분은 바로 무령왕릉으로 현재 충청남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7개의 고분 중 하나에요.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공주 송산리 일대에는 백제의 왕 또는 귀족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이 30여 개나 있었다고 해요.
공주의 옛 이름은 웅진으로 이 지역은 백제가 한성을 떠나 63년간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었거든요.
그런데 광복 후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직전에는 6개의 고분만이 남아 있었어요.
고분의 명칭도 1호~6호분으로 숫자로만 불렸어요.
고분의 유물이 일제 강점기에 도굴되어 없었기 때문에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거든요.
그 중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릉의 발견과 관계가 있어요.
이 고분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일제 강점기 공주의 한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일본인이었어요.
그는 1938년 송산리 6호분을 발견했다고 조선 총독부에 알렸어요.
그러면서 유물이 전혀 없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정말 고분 안에는 유물이 없었을까요?
훗날 사람들이 6호분 내부를 자세히 조사해보니 빗자루로 뭔가를 쓸어낸 흔적이 있었다고 해요.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만들어졌고 동서남북 4면에 도교의 방위신인 사신도가 그려져 있었어요.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까지 백제의 고분 중 유일한 벽돌무덤으로 인정받았어요.
이런 고분에 물이 차면 큰일이겠죠.
그래서 1971년 7월 장마에 대비해서 이 고분의 뒤편에 물길을 내는 작업을 하게 된 거예요.
한참 작업을 하던 7월 5일, 흙을 퍼내던 삽에 ‘툭’하고 돌이 걸렸어요.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자 무덤의 입구 같은 것이 보였어요.
무령왕릉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 것이죠.
무령왕릉은 주변의 고분과 달리 다행히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어요.
무령왕릉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고분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고분이에요.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무덤 입구에서 무령왕의 이름이 새겨진 네모반듯한 돌(지석)이 나왔거든요.
무령왕릉 지석
국립공주박물관
지석에는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해 돌아가셨다.’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어요.
이 중에서 ‘사마왕’이 바로 무령왕이 살아있을 때 불리던 이름이에요.
‘사마’는 일본어로 ‘섬(시마)’이라는 뜻이에요.
무령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왕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가던 중 일본 규슈 북쪽의 한 섬에서 무령왕을 낳았기 때문에 붙여진 거지요.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금제관 장식을 포함해서 약 4,600여 점의 유물이 나왔어요.
그중 12건 17점의 유물이 국보로 지정되었어요. 자!
그럼 무령왕릉에 나온 대표적인 유물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