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초기 무덤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

백제 초기 무덤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

M 지금 0 339

석촌동은 돌이 많았던 마을로 ‘돌마리’라고 불렸어요. 

돌무덤이 무너져 내리면서 돌이 많이 쌓여 있던 마을이지요. 

일제 강점기에는 최소 89기 가량의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있었다고 해요. 

주변에 있는 방이동 고분군과 함께 백제 초기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이지요.

하지만 그 많던 무덤들은 보존되지 못하고 훼손되어 갔어요. 그 

땅에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지었거든요. 

1970년대 들어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이 또한 제대로 된 발굴이 아니었어요. 

도시 정비 사업을 위한 것이었지요. 

무덤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덮어야 했어요. 

무덤 아래로 지하 차도를 만들기까지 했어요. 

안타깝게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 4개를 비롯해 땅을 움푹 파서 시신을 묻은 움무덤 등 8기만 복원돼 남게 되었지요.


돌무지무덤 중에는 규모가 상당히 큰 무덤이 있어요. 

바로 3호 무덤이지요. 

3단으로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바닥 지름이 50m나 돼요. 

학자들은 높이가 더 높았을 것으로 이야기하기도 해요.


이 무덤은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요? 

이 정도 큰 규모라면 무덤 주인은 꽤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무덤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기도 해요. 

하지만 어떤 정확한 증거도 나오지는 않았어요. 

무덤 안에서 백제 토기, 청자 조각, 금으로 만든 장식 등이 발굴되었어요. 

적어도 왕족의 무덤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유물이지요.

무덤을 자세히 보세요. 어디서 본 듯하죠? 

장군총과 같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과 비슷하지요. 

두 나라 무덤 구조가 비슷한 이유는 백제를 세운 사람이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석촌동 고분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돌무지무덤 20여 기가 발견되었어요. 

무덤 안에서는 백제의 역사를 알려주는 여러 가지 유물도 출토되었어요.


한편 석촌동 고분군 근처에는 방이동 고분군도 있어요. 

8기의 굴식돌방무덤(관을 넣는 돌로 만든 방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만든 뒤 흙으로 덮은 무덤) 형태의 무덤이 모여 있지요. 

처음에는 백제 초기 무덤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는데, 신라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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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서울 송파구)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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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동 고분군(서울 송파구)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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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한강 유역 유적
M 지금 0 314 2024.06.30
백제는 수도를 세 번 옮겼어요.그래서 수도 위치에 따라 한성 시대(기원전 18~475), 웅진 시대(475~538), 사비 시대(538~660)로 나누기도 하지요.웅진성(공주)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를 웅진 시대, 사비성(부여)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를 사비 시대라고 해요.그렇다면 한성 시대 수도는 어디였을까요?『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가 백제를 세운 이후 백제의 수도는 하남 위례성이었다고 해요.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475년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곳이지요.예전에는 하남 위례성이 어디인지 의견이 분분했어요.한성 백제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되기 전이어서 백제 초기 수도가 어디라고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었지요.그런데 1925년 일어난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 주변에 물이 차올랐다가 빠졌어요.그때 한강 곁에 있던 지금의 풍납동 지역 토성 일부가 무너져 내려 묻혀 있던 백제 초기 유물이 발견되었어요.하남 위례성의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몇십 년 뒤인 1997년 풍납동 일대에 아파트 단지 공사가 진행되자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어요.공사 중에 백제 초기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에요.공사는 중단되고,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어요.그러면서 풍납동 주변이 백제의 수도였고, 풍납동 토성이 백제의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풍납동 토성에서 가까운 올림픽 공원에도 또 하나의 토성이 있어요.바로 몽촌토성이지요.풍납동 토성과 함께 백제 수도의 성으로 추정되는 곳이에요.몽촌토성 가까이에는 백제 초기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도 남아 있어요.바로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이지요.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 등은 한성 백제 시대 수도 위치와 당시 백제가 어떤 나라였는지 보여준답니다.지금부터 한강 유역의 백제 유적을 돌아보며 백제 초기 모습이 어땠는지 알아볼까요?
한성 백제의 수도, 풍납동 토성
M 지금 0 306 2024.06.30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는 국가에서 사적지로 지정한 마을이 있어요.한성 백제의 수도로 추정되는 풍납동 토성 안에 있는 마을이지요.풍납동 토성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5년 대홍수가 났을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어요.성벽이 무너지면서 귀걸이, 청동 거울, 수막새, 유리구슬, 토기, 청동 초두 등이 발견되었어요.음식을 끓일 때 사용하던 자루가 달린 청동 솥인 청동 초두는 다른 유물과 함께 항아리 속에 담겨 있었어요.이러한 유물이 발굴되면서 풍납동 토성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지요.청동 초두국립중앙박물관풍납동 토성은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 토성 중 가장 규모가 크지요.성벽 높이가 건물 5층 높이인 11m가량으로 북서쪽에 한강을 끼고 만들어졌어요.강가에 있어서 한강을 통해 바다로 나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과 교류하기 좋았어요.성안 경당 지구에서는 초대형 건물터와 기와, 건물 주춧돌 등 관청이나 궁궐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이 발굴되었어요.건물 기둥을 꾸미던 장식품은 이곳에 지어진 건물이 특별한 건물이었음을 보여주지요.수도로 추정되는 곳답게 자갈이 깔린 꽤 넓은 도로도 발견되었어요.백제 관직 이름인 ‘대부(大夫)’라고 쓰인 토기, 제사용 그릇, 시루, 큰 항아리, 유리 공예품 등 수만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어요.제사에 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말뼈도 구덩이에 많이 묻혀 있었어요.중국의 청자 대접, 중국 동전인 오수전도 나왔어요.바다 건너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이지요.풍납동 토성은 한마디로 백제의 보물 창고와 같았어요.풍납동 토성 발굴을 통해 기록에만 존재하던 한성 백제의 모습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어요.풍납동 토성 복원 모형(한성백제박물관)‘대부(大夫)’라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국립중앙박물관
특별한 방어 시설을 갖추었던 몽촌토성
M 지금 0 248 2024.06.30
몽촌토성은 풍납동 토성 남쪽에 있는 성이에요.백제 초기 수도는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것 같아요.풍납동 토성이 북쪽에 있던 성이고, 몽촌토성은 남쪽에 있던 성인 거지요.몽촌토성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경기장 등을 짓는 과정에서 존재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어요.올림픽 공원을 만들면서 공원 안에 있던 몽촌토성을 발굴했는데, 그 과정에서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어요.땅속에서 나오는 유물들이 예사롭지 않았거든요.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던 물건이 아니었어요.몽촌토성이 특별한 곳임을 알게 해주었지요.계속된 발굴 조사 결과 군대 막사로 추정되는 주거지와 저장 구덩이, 굽다리 접시, 세발 그릇, 기와, 철제 도구, 뼈 갑옷 등이 발굴되었어요.이러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몽촌토성이 방어용 성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었지요.청자 조각이나 금동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 등은 중국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물이에요.강가의 편평한 곳에 쌓은 풍납동 토성과 달리 몽촌토성은 자연적인 지형인 언덕을 이용해 쌓은 성이에요.성 밖에는 성내천 물길을 이용해 해자를 만들었어요.해자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특별한 시설이지요.나무 목책을 둘렀던 흔적도 남아 있어요.성 가장 높은 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몽촌토성 일대가 한눈에 보여요.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좋은 구조란 걸 쉽게 알 수 있어요.왕이 거처하면서 백성들을 다스리던 풍납동 토성과 달리, 몽촌토성은 외적의 침입과 같은 비상시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성격이 강한 곳이었답니다.몽촌토성
백제 초기 무덤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
M 지금 0 340 2024.06.30
석촌동은 돌이 많았던 마을로 ‘돌마리’라고 불렸어요.돌무덤이 무너져 내리면서 돌이 많이 쌓여 있던 마을이지요.일제 강점기에는 최소 89기 가량의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있었다고 해요.주변에 있는 방이동 고분군과 함께 백제 초기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이지요.하지만 그 많던 무덤들은 보존되지 못하고 훼손되어 갔어요. 그땅에서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지었거든요.1970년대 들어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이 또한 제대로 된 발굴이 아니었어요.도시 정비 사업을 위한 것이었지요.무덤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덮어야 했어요.무덤 아래로 지하 차도를 만들기까지 했어요.안타깝게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 4개를 비롯해 땅을 움푹 파서 시신을 묻은 움무덤 등 8기만 복원돼 남게 되었지요.돌무지무덤 중에는 규모가 상당히 큰 무덤이 있어요.바로 3호 무덤이지요.3단으로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바닥 지름이 50m나 돼요.학자들은 높이가 더 높았을 것으로 이야기하기도 해요.이 무덤은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요?이 정도 큰 규모라면 무덤 주인은 꽤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무덤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기도 해요.하지만 어떤 정확한 증거도 나오지는 않았어요.무덤 안에서 백제 토기, 청자 조각, 금으로 만든 장식 등이 발굴되었어요.적어도 왕족의 무덤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유물이지요.무덤을 자세히 보세요. 어디서 본 듯하죠?장군총과 같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과 비슷하지요.두 나라 무덤 구조가 비슷한 이유는 백제를 세운 사람이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해요.석촌동 고분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돌무지무덤 20여 기가 발견되었어요.무덤 안에서는 백제의 역사를 알려주는 여러 가지 유물도 출토되었어요.한편 석촌동 고분군 근처에는 방이동 고분군도 있어요.8기의 굴식돌방무덤(관을 넣는 돌로 만든 방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만든 뒤 흙으로 덮은 무덤) 형태의 무덤이 모여 있지요.처음에는 백제 초기 무덤이라는 …
토성은 어떻게 쌓았을까?
M 지금 0 254 2024.06.30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둘 다 흙으로 쌓은 성이에요.성을 흙으로 쌓아 쉽게 무너졌을 것 같다고요?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요.하지만 생각과 달리 무척이나 단단하고 튼튼하답니다.오랜 시일이 지나도 성의 일부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을 정도지요.어떻게 흙으로 이런 튼튼한 성을 쌓을 수 있었을까요?흙성을 쌓는 특별한 방법인 판축 공법 덕분이에요.콘크리트 못지않게 단단하게 쌓을 수 있는 방법이지요.판축 공법은 시루떡을 만드는 방법과 비슷해요.시루떡 만들 듯이 흙을 층층이 다져가며 쌓아 올리는 방식이에요.서로 다른 종류의 흙을 다지고 다져 한층 한층 쌓아 올렸지요.판축기법으로 토성을 쌓는 모습(한성백제박물관)또 하나의 비밀은 나뭇가지나 나뭇잎 등을 섞어 쌓는 부엽 공법이에요.네모난 나무틀을 만든 다음 진흙을 부어 단단하게 다졌어요.그 위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를 쌓고, 다시 진흙 쌓기를 반복해 여러 층을 쌓아 올렸어요.나뭇가지나 나뭇잎을 흙 사이에 다져 넣으면 흙이 쓸려나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해요.이렇게 성을 쌓은 뒤 성벽을 덧대어 쌓았지요. 반질반질한 강돌을 넣기도 했어요.어때요?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이 오랜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잘 보존된 이유를 알겠지요?
사적지로 지정된 마을
M 지금 0 257 2024.06.30
풍납동 토성은 1925년에 대홍수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서서히 잊혀갔어요.당시 청동 초두는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서 가져갔다고 해요.그러다 풍납동 토성의 존재가 다시 주목받는 일이 벌어졌어요.1997년의 일이에요.토성 안에서 아파트를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어요.터파기를 하자 그곳에서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어요.하지만 제대로 된 보존 계획 없이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지요.세월이 흘러 주민들은 다른 땅에 아파트를 지으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지요.국가에서는 이 지역을 발굴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어요.아파트를 세우려는 주민들과 국가 사이에 갈등이 생겼지요.이후 긴 시간 동안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마을은 사적지로 정해졌어요.10여 년에 걸친 발굴 조사도 진행되었지요.이후 백제 초기 수도로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했어요.땅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백제의 역사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랍니다.백제 초기 수도인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그 주변 유적을 살펴보니 백제의 역사를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었지요?앞으로 발굴과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백제 초기의 역사를 조금 더 생생하게 만날 수 있게 될 거예요.우리 앞에 펼쳐질 백제 역사를 함께 기대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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