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 백제를 세우다

비류는 온조와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바다와 가까운 미추홀로 떠나 버렸어요.
온조는 강 남쪽 위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어요.
나라 이름은 열 명의 신하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고 십제(十濟)라 하였지요.
비류가 도착한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곡식이 잘 자라지 않는 곳이었어요.
오래되지 않아 비류는 미추홀이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는 곳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비류는 온조가 세운 십제를 돌아보았어요.
도읍은 안정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살고 있었지요.
비류는 자신의 선택을 몹시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다 병에 걸려 죽었어요.
그러자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로 돌아와 온조와 함께 하기를 청했어요. 물론 온조는 이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였지요.
백제의 건국과 확장
인구가 늘어나자 온조는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어요. 나라가 전보다 커지자 모든 백성들이 즐거워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고구려를 세운 양아버지 주몽이 부여에서 왔다고 하여 부여를 성씨로 삼았지요.
백제의 왕들은 왕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냈어요. 제사를 통해 자신의 뿌리가 부여라는 점을 강조하고, 왕실과 귀족 간의 단결을 꾀했던 것이지요.
온조가 백제의 도읍으로 삼은 한성(위례성)은 현재 풍납토성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풍납토성은 한강가 들판에 있어 적의 침입을 막기에는 불리하였어요. 그래서 산 위에 절벽이나 능선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과 달리 평지부터 높게 성벽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했어요. 풍납토성의 성벽은 흙과 진흙을 차례로 다지고 중간에 나뭇가지와 짚을 넣어서 튼튼하게 만들었어요.
백제의 건국과 풍납토성(한성백제박물관)
한성(위례성)은 한강과 서해 바다를 통해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먼 지역과 교류했어요. 바다 건너편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한성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다양한 사람과 문물을 바탕으로 백제는 점점 풍요롭고 부강한 나라가 되어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