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를 지어달라고 무왕에게 요청한 왕비는 누구일까?

미륵사지 석탑의 서탑을 해체·수리하던 2009년 1월, 역사학계를 크게 흥분시킨 일이 일어났어요.
미륵사지 석탑 1층 심초석(탑의 중앙 기둥을 받치는 돌) 내부에서 석탑 건립 당시 묻었던 금동제 사리외호와 금제 사리내호, 유리제 사리병, 금제 사리봉안기, 칼, 유리판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던 것이에요.
사리장엄구는 불탑에 사리를 넣을 때 함께 넣은 용기나 공예품 등을 총칭해서 나타내는 말이에요.
그중에서도 금으로 제작된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를 창건해 달라고 요청한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답니다.
복원 공사 중에 발견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
국립문화재연구소
사리봉안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백제 무왕에게 시집온 신라의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지어달라고 무왕에게 요청했었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금으로 제작된 사리봉안기에는 ‘사택적덕의 딸’이 백제 무왕의 왕비이자 미륵사를 창건해달라고 요청한 주인공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에요.
이 발견으로 인해 역사학계는 발칵 뒤집혔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이 완전히 틀린 내용으로 판명 났기 때문이었죠.
즉,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봉안기 발견 이후 백제 무왕의 부인이 선화공주였다는 것과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허구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어요.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미륵사 창건 관련 기록은 정말 가공된 설화이며,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직까지 일부 학자들은 금제 사리봉안기의 내용만으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부부가 아니었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보기도 해요.
즉, 미륵사는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서탑을 만들자고 요청한 인물이 사택 왕후라면 중앙의 목탑이나 동탑은 선화공주나 또 다른 왕후의 요청으로 만든 탑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사람은 사택 왕후가 선화공주 대신 자신의 이름을 사리봉안기에 남겼을 수도 있다고 주장해요.
왜냐하면 선화공주는 백제의 적국인 신라 진평왕의 딸이었던 반면, 사택 왕후는 당시 백제에서 가장 힘이 센 귀족인 사택 가문 출신이자 최고 높은 관직인 좌평으로 있던 사택적덕의 딸이었기 때문이에요.
즉, 백제 무왕에게는 처음에 미륵사를 짓자고 요청한 사람은 선화공주이지만, 그녀가 죽은 후에는 사택적덕의 딸이 왕비가 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유물의 발견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 바뀔 수도 있고, 같은 유물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올 수도 있어요.
여러분도 방학이나 주말에 미륵사지 석탑을 보러 가서 실제 석탑의 모습과 유물을 보면서 미륵사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상상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