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서역과 교류하다

고대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고대 삼국 중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어요.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둘러싸여 있었고, 지형적으로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 가로막혀 있었어요.
이렇게 한반도 동남부에 갇힌 신라는 나라의 발전 속도가 빠르지 않았어요.
400년,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신라에 쳐들어왔을 때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고, 5세기에 고구려가 남쪽으로 진출할 때에는 백제와 동맹을 맺고 소백산맥에 의지해 간신히 나라를 지켜냈어요.
백제와 고구려에 시달리며 나라를 유지하던 약소국 신라는 5세기 무렵에 왕권을 강화하면서 조금씩 힘을 키워갔어요.
왕권이 강해지면서 왕릉의 크기도 더욱 커졌지요.
황남대총이나 천마총같이 지금 남아있는 거대한 신라 왕릉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어요.
신라가 왕을 중심으로 나라의 힘을 키워가면서 중국 여러 나라와의 소통에 큰 관심을 기울였어요.
중국의 나라들과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면서 신라는 임금을 뜻하는 명칭을 ‘마립간’에서 ‘왕’으로, 정치 제도도 중국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어요.
중국과 교류하면서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왔던 서역의 물건들도 신라에 들어왔어요.
지중해 연안의 로마나 아라비아에서 만들어진 유리병이나 유리잔, 녹색의 터키산 보석을 박아 만든 금팔찌, 서역 사람이 새겨져 있는 은잔 등이 바로 그러한 물건이었어요.
삼국시대 교역로
또한 중국에 온 상인들을 통해 신라가 서역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신라는 금이 많이 나고 살기 좋은 나라로 서역에 소개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역의 상인들이 직접 신라를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서역 상인들은 유리, 진주, 호박, 향료, 카펫 등 귀한 물건을 싣고 중국 당나라를 거쳐 신라에 왔어요.
그리고 신라의 금과 은, 비단, 인삼 등을 사서 돌아갔어요.
신라가 당과 연합해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와 당의 교역은 더 늘어났어요.
한때 신라인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신라-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을 장악하기도 했어요. 장보고의 청해진 시기 이후에도 더 많은 서역 상인들이 신라를 찾아왔어요. 당시 서역의 한 학자는 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어요.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교도가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물건을 팔러 온 서역인들에게 땅이 기름지고 물이 많은 신라가 사막으로 가득 찬 자신들의 나라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되었나 봐요.
그래서 일부 서역인은 신라에 남았어요.
경주 원성왕릉(괘릉)이나 구정동 방형 무덤의 무인상은 이때 남은 서역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원성왕릉(괘릉) 무사상, 구정동방형무덤 무사상, 중앙아시아 소그드인 마부상(7세기 당 제작)
경주시청, 국립경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시대 역사는 우리에게 아주 먼 옛날이야기 같아요.
하지만 그때도 우리 민족은 세계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나라의 발전을 고민하였어요.
유물을 통해 우리 민족은 어떻게 세계와 교류했는지 좀 더 알아보아요.